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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5일. 나그네는 눈을 떴다. 어색한 아침이었다.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온 나그네는 제자리에서 가볍게 두어번 뛰더니 제 검을 챙기고 자리를 박차고 방문을 열었다. 프리랜서 숙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가 있어야 할 거 같긴한데 원래 여기엔 누가 있어야하더라? 생각이 나지않아 찝찝한 숙소를 벗어나 그는 길을 걸었다. 사람이야 많았다. 사실 저 걸어다니는 게 사람인지 다이버인지 까맣게 타버린 시체들이 걸어다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지만 딱 하나만은 확실했다. 여기는 눈이 오고 있었다. 닿아도, 맨발로 밟고 지나가도 차갑지 않은 그런 눈. 쌓이지도 않는 눈이 자꾸 볼에 닿자마자 녹아 흘러버리자 나그네는 그 부위를 소매로 거칠게 닦아냈다.

"형."

이제 끝이 보이지 않는 저 길을 걸어보자. 생각할 때 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길고 네모난 상자를 걸어오는 것처럼 주변에 아무것도 없이 펼쳐진 길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시야 끝에는 빨강 미끄럼틀과 빨강 페인트가 다 벗겨진 정글짐, 빨강 기둥 아래로 사슬로 연결된 타이어 그네. 아기자기한 놀이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그네는 멍하니 홀린 것처럼 느린 걸음을 그 쪽으로 옮겼다. 뿌연 안개가 낀 거 같이 보였던 놀이터는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졌고 그네에 앉아있는 저를 부른 사람도 뚜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깐 쟤는.

아.

소리낼 틈 없이 순간 눈앞이 빙그르르 돌아 하얀 하늘에 떠있는 구정물이 물든 칙칙한 구름을 스쳐 빨갛게 반짝이더니 점박이 모자이크에 점멸해갔다.



-



8월15일. 제임스는 눈을 떴다. 익숙한 아침이었다.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와 제임스는 딱히 준비할 거 없이 검도 가면도 붕대도 약도 모두 두고 텅 빈 프리랜서 숙소의 거실을 지나 아예 벗어나버렸다. 비광도 나그네도 모두가 없는 이 곳은 제 집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온 숙소 밖의 거리는 수십번 수백번 수천번 걸어봐도 긴 네모난 상자같았다. 일정 거리를 가면 투명한 벽에 막혀버렸다. 나그네의 상상력의 한계였다.

안녕?

풍선을 들고 제 부모의 양 손을 잡은 한 아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제임스는 답하지 않고 지나쳐 길을 걸었다. 이 눈이 내리는 거리를 걷는 건 사람도 다이버도 까맣게 타버린 시체도 아니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닐 뿐. 어쩌면 나그네가 되고 싶었을 그 어떤 것. 어느정도 걷다보면 오싹하게도 빨간 페이트로 뒤덮인 놀이터가 자리한다. 여기서 그네에 앉아 있다보면 그가 스스로 찾아오게 되어있다. 지금 같이 좋지도 않은 제 눈이 선명하게 멀리서 지나가는 그를 잡아챌정도니깐 여긴 정말 말도 안되는 공간.

"형."

살짝 부르자 좁은 공간에 부딪혀 울리는 목소리는 멀리멀리 퍼졌고 나그네는 자연스레 이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서서히 걸어온다. 그는 제가 보이지 않는 듯 흐린 눈동자로 미끄럼틀과 정글짐을 한번 훑어낸다. 그리고 그 눈동자가 그네기둥을 타고 사슬로 미끌어져 내려오면 제임스에게 닿는다. 진득하게 가라앉아 검은 눈동자와 마주치면 나그네의 선명한 파란 눈동자는 빛이 아른거리기 무섭게 곧 모든 공간을 무시하고 무지바하게 돌진하는 트럭 한대가 트럭에 비해 연약하고 왜소한 몸을 쳐버린다. 재미도 감동도 없는 같은 레파토리. 같은 시간과 장소와 사건 그리고 인물. 제임스는 슬슬 눈물도 안 나오게 지쳐버려 나그네가 저에게 뭘 보여주고 싶은건지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벌써 8월15일. 제임스는 눈을 떴다. 익숙한 아침이었다.



-



비광은 비좁은 침대 위에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쥐죽은 듯이 자고있는 두 아이의 머리를 한번씩 쓰다듬어 줬다.

"얼른 일어나그라잉."








잠든 나그네와 꿈 속으로 그를 찾으러 간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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