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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얀데레 집착





1.
제임스는 고등학생이었다.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을 두고 상경해 가진 거라고는 작고 초라하지만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원룸 하나와 친구들은 공부할 시간에 밤 꼬박 새어가 편의점에 일하며 아르바이트로 잔고를 쌓아올린 통장 뿐인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는 남들과 같이 아침이 되면 들려 버스 카드를 충전하고 학교에 가 이름도 잘 기억 안 나는 옆자리에 앉은 짝지랑 예의상 인사 한번을 나눈다. 그 다음은 엉덩이에 쥐가 날 정도로 의자에 딱 붙어앉아 도수가 안 맞지만 바꿀 여력이 없어 그냥 쓰고 있는 안경을 억지로 껴 수업을 듣고 점심 종이 치면 급식실로 향하는 학우들의 뒷통수를 바라보다 편의점에서 샀던 인스턴트 도시락의 포장지를 뜯는다. 다 식어 맛이 하나도 없지만 굶지 않고 사는 것만이 어딘가. 성적도 어중간, 특기칸은 텅텅 비고 장래희망이 공무원인 제임스에게는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위태롭다.

그런 제임스에게도 유일한 취미가 있는데 바로 밤하늘 관측이었다. 동아리 역시 천문 동아리였다. 그는 좁은 원룸 한 구석에 이사 오면서 주워온 낡아빠진 망원경 하나로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 깜깜한 밤하늘을 돌아보곤 한다.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을 때도 있고 별이 총총 떠있기도 하고 가끔은 비행기도 지나가는 게 보인다. 그게 제임스에게는 눈이 아팠던 일, 아르바이트 때 진상 손님, 지독하게 올라오는 외로움을 잊고 혼자 우주에 둥둥 떠있는 기분을 전해줬고 그가 망원경을 찾는 일이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다보니 이제는 잠자기 전 습관으로 남아버렸다. 

"다녀왔습니다."

오늘도 너털걸음으로 집에 돌아온 제임스는 깜깜하게 꺼진 방에 불을 켜고 보일러를 꺼둬 걸을 때마다 올라오는 한기를 밟았다. 발끝이 시려오는 걸 애써 무시한 채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바로 침대 옆에 놓인 망원경을 들고 돈을 조금 더 보태 옵션으로 맞춘 발코니로 나가니 낮부터 날씨가 흐려서인지 구름으로 얼룩덜룩하게 물들어있는 하늘이 보였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잖아. 어제 아르바이트에서 사장 딸이 수줍은 표정으로 번호를 달라고 휴대폰을 내미는 걸 거절했다고 오늘 유일하던 아르바이트에서 해고통지를 받아 우울했던 제임스의 마음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에 더욱 우중충해졌다. 

운도 지지리 없어라. 망원경에 한쪽 눈을 대고 혹시 구름 사이로 삐져나온 별이라도 있지 않을까 찾던 그는 한숨을 쉬었다. 보일리가 없잖아. 천체망원경도 아닌 일반망원경이라 날씨가 좋을 때만 대략적인 하늘을 감상 할 수 있기에 결국 오늘은 포기하고 내일 등교를 위해 잠이나 자려던 제임스는 조용한 한밤 중 공기를 가르고 멀리서 들려오는 도란도란 말소리에 방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광 아파!"
"으이구... 아무거나 받아오지 말랬..."

꽤나 먼 거리에서 들려오는 듯 소리가 뭉그러져 들려왔다. 시계가 새벽 1시를 달리는데 누가 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거지? 평소라면 무시하고 지나칠만 했지만 오늘은 그냥 자면 악몽 속에서 해매다 5시쯤 애매하게 깨서 하루종일 좀비마냥 지낼 거 같은 기분에 시간을 떼우고자 없던 호기심을 끌고 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망원경 끝을 겨눴다.한 블럭 떨어진 아파트 창문 중 층높이가 제임스의 원룸과 비슷하고 유일하게 발코니 문을 활짝 열려있으면서 온 방의 불을 켜둔 집이 눈에 확 띄었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내부에는 닿기만 해도 푹신할 거 같은 쇼파 위에 하얀 그리고 긴 머리카락을 가진 이가 웅크려 앉아있었고 머리는 짧지만 노골적인 몸의 굴곡이 드러난 키가 크다고 생각되는 여자가 이의 등을 마구 내리치며 입을 달싹였다. 목소리를 줄였는지 더 이상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망원경 렌즈 너머는 바로 앞집 마냥 가깝게 보였다. 한참을 지켜보니 때리는 쪽이 여자라 맞고 있는 쪽 역시 머리도 길고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신나게 두들겨 맞다 못 참겠는지 발딱 일어난 이의 체격은 신기하게도 저보다 건장하고 커보였다. 그리고 잘생겼다. 얼굴은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잘 생겼다는 분위기가 팍팍 뽐내고 있었다.

"잘 생겼다는 분위기라는 건 뭐람."

자기가 생각하고도 웃긴지 제임스는 입 밖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곤 두들겨 맞아 얼얼한 등을 쓸어내린 남자가 뭐라 빽 말하나 싶더니 시야에서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누나와 남동생 사이 같이 보이는데 게임을 많이 해서 혼난걸까? 여자까지도 남자가 사라진 길을 따라 시야에서 사라지자 제임스는 끝난건가 싶어 불만 켜져있지 빈 거실을 바라보다 망원경을 치우려했다. 그러나 곧 남자는 여자의 손에 귀가 잡혀 질질 시야 안으로 들어섰다. 체격은 여자보다 크면서 그녀의 손 하나에 제압 당하는 모습이 우스워 제임스는 그만 소리내 웃음소리를 내버렸다.



2.
날이 개여 하늘이 훤히 트였지만 제임스는 그래도 그 때 봤던 집을 엿보는 일을 빼먹지 않았다. 재밌어서라는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 있지만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하는 행동이 귀여워서라고 할 수도 있다. 거실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남자의 방이었는지 밤에 집에 들어와 살펴보면 늘 그가 있었다. 어쩔 때는 쇼파에 누워 잠들어있기도 했고 쵸코파이를 좋아하는지 잔뜩 쌓아놓고 먹다가 여자에게 걸려 된통 혼나기도 했다. 아 가끔은 TV 유아용 프로그램을 멍 때리며 바라보기도 했다.

제임스는 이제 하늘 대신 그가 잘 때면 한참을 자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만족하고 저도 자러갔고 쵸코파이를 먹을 때면 편의점에서 사온 과자 한봉지를 까놓고 지켜봤다. 유아용 프로그램을 볼 때 역시 소리는 안 들리지만 생각보다 캐릭터가 귀여워 같이 보곤했다. 비록 제임스가 일방적으로 지켜보는 사이지만 그는 요즘 들어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번도 하얀 남자와 눈을 마주친 적도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지만 이 시간이 기다려지고 행복했다.

그 때도 제임스는 여느 때와 같이 발코니에서 그가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막 씻고 나왔는지 후줄근한 트레이닝 복을 걸치고 목에 축축해보이는 수건을 두르고 제임스같이 발코니로 나왔다. 그의 한 손에는 우유가 들려있었다. 제임스는 멍하니 젖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얼굴을 바라봤다. 몇 일을 훔쳐봐왔지만 제대로 보는건 처음이었다. 비록 해는 다 져버려 깜깜했지만 켜져있는 형광등 불빛과 뒤에서 비춰주는 방 조명 덕에 제임스는 그의 머리카락 못지않게 새하얀 속눈썹과 이목구비를 볼 수 있었다. 턱을 괴고 쥐죽은 듯 조용한 바깥을 신기하게 구경하는 그의 모습은 여자라고 착각할정도로 아름다워 잠시 숨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자니 남자는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건지 옥구슬 같은 눈동자는 데굴데굴 굴러 주변을 살피더니 숨을 들이마쉬고 뱉지 못하고 있는 제임스가 있는 쪽을 똑바로 바라봤다.

".."

제임스는 그와 마주하고는 깜짝 놀라 그만 확 주저앉아 발코니 사이로 몸을 감췄다.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미친듯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진정하고자 목 밑을 양 손으로 잡고 숨을 천천히 내쉬려해도 다시금 금방 마주쳤던 제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하늘을 담아놓은 것만 같은 청명한 눈동자가 떠올라 손목의 동맥마저도 날생선마냥 팔딱팔딱 날뛰어 버린다.



3.
최근 이틀정도는 그의 집을 훔쳐보는 일을 그만뒀다. 대신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진정하려 했지만 총총 박혀있는 별마저도 그의 눈동자를 연상시켜 소용이 없었다. 결국 오늘도 밤을 설쳐 다크써클이 광대까지 내려온 상태로 등교하자 학우들이 슬슬 자리를 피해줬다. 제임스는 이름도 모르는 짝지에게 인사 건네는 것도 잊고 책상에 엎드리듯 누워 눈을 감았다. 피곤하다. 근데 잠은 오지않는다. 불치병 환자가 되버린거 같아 약을 더 늘려야하나, 부모님께 말씀드려야하나 고민하는 중에 모든 잡념을 산산히 깨뜨리는 귓가를 쿵쿵 울리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아침마다 반 여자애들이 틀어놓는 뮤직비디오에서 나는 소리겠지. 

"봤어? 이번에 티져 떴어!"

시끄러운 소란 속에서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엎드린 몸을 일으켜 세우자 머리가 징징 울려댄다. 겨우 일어나 책상에 팔을 괴고 앉아있자니 여자애들의 꺅꺅 하이톤 비명소리가 귀를 째질 듯이 괴롭힌다. 대체 이번엔 누구길래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걸까. 주변을 둘러보니 이런 쪽에 흥미없어 하는 이들도 문제집을 펴놓고 흥미롭게 뮤직비디오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처럼 인상 쓴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제임스는 제가 요즘 TV를 유아용 프로그램 외에는 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반 애들을 열광시킨 최신 트랜드의 얼굴이 궁금해져 벽걸이 TV로 시선을 옮겼다.

"아."

그곳에는 3일 전에 봤던 별을 빼다박은 눈동자가 저를 훑 듯이 스쳐지나갔다. 순간 털 끝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TV속에서 무대의상을 갖춰입고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질하고 높게 묶은 모습. 눈구덩이에 발려진 반짝이 쉐도우가 그에게 잘 어울려 은하수 같았다는 것만이 빠르게 지나간 티져 속에서 제임스에게 닿았다. 아이들은 영상을 보며 역시 프리랜서 소속사는 스케일이 크다니깐, 나그네가 잘 소화해낸거지! 라는 갖가지 기대를 늘어놓으며 목소리를 키웠고 그 사이에서 제임스는 넋을 놓고 꺼져가는 영상 위로 프리랜서라고 네 글자가 박힌 소속사 로고가 사라져가는 유투브 화면만을 바라봤다.



4.
배우 모델 가수. 갖가지 수식어가 그를 뒤따랐다. 아르바이트에 짤린 후로 한가한 저녁시간대에 간만에 피시방을 들린 제임스는 나그네, 프리랜서라는 키워드로 서칭할 때마다 나오는 무한한 찬사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했다. 밤에 지켜봐서 자세한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빨간 끈으로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대충 묶고 나른한 눈빛만으로 퇴폐적인 분위기를 내뿜는 프로필 사진은 확실히 멋있고 아름다웠지만 늘 보던 그와는 달라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그는 좀 더 애같고 바보같고, 대형견 같은 느낌이었던 거 같은데. 프로필의 옆을 보니 누나라고 생각했던 이는 전직 슈퍼모델 출신인 소속사 대표라고 나란히 써있었다.

"나그네.."

제임스는 그의 출현작과 받은 상들을 보면서 나지막히 이름을 읊조렸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느 블로그의 말로는 콘서트 횟수는 손에 꼽고 정말 노래만 부르다 갔다더라, 드라마에 출현한 적도 없지만 영화에서는 차갑거나 시크한 도시의 남자 컨셉으로만 출현하더라, 본명 나이 생일을 아는 이도 없는 신비주의, 같이 와인을 마시고 싶은 남자 연예인 순위 2위, 예능에 나오지 않아 성격도 잘 모르겠다 등등. 그보다 더 많이 자료들이 있었지만 제임스는 눈이 지끈지끈 아파와 미간을 꾹 누르면서 그가 부른 노래를 틀어놓고 있던 창을 제외하고는 띄우고 있던 창을 모두 꺼버렸다. 



4-1.
아르바이트생이 10시 이후로는 청소년은 금지라며 교복을 입고 푹신한 피시방 의자에 몸을 기대면서 나그네가 부른 모든 노래를 반복재생해 듣던 제임스를 재촉했다. 언제부터 그런 법이 있었는지 별로 나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곤란한 아르바이트생을 보자니 마음 약한 제임스는 버틸 수가 없어 카운터에서 돈을 계산하고 쌀쌀한 바깥으로 나와 걸었다.



5.
제임스는 흥얼흥얼 들었던 노래에 맞춰 몸을 들썩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여느 때와 같이 망원경을 챙겨 발코니로 나갔다. 평소보다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의 집은 창문이 활짝 열려있고 불이 켜져있었다. 눈이 마주친 후부터 관뒀다 다시 잡은 망원경은 괜히 무게가 더해진거 같고 훔쳐보기 전부터 벌써 제임스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한다. 세심하게 시야를 맞추고 볼까말까 망설이다 렌즈에 눈을 가져다댔더니 오늘도 발코니에 나와있는 나그네가 보였다. 그는 프로필 사진과 같이 머리는 빨간 천으로 돌돌 묶어내고 있었지만 프로필과는 다르게 제 시야 안에서의 그는 부드럽고 온순한 느낌으로 멀리 보이는 국도의 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천진난만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제임스는 또 들킬까 마음을 졸이면서도 나그네에게 끌려 잠시라도 망원경에서 눈을 못 떼는 저를 책망했다.

오늘의 이 때도 이틀 전의 그 때와 같았다. 제임스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며 그의 오똑한 콧날부터 쭉 이어지는 조각같은 외모를 넋을 놓고 감상하고 있는데 마음의 준비도 못한 상황에서 나그네의 시선은 배회 없이 휙 제임스에게 향했다. 너무 곧고 유순한 눈길이라 그 때와는 달리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 숨어버릴 타이밍을 놓친 제임스는 그저 멀리서 향하는 나그네의 시선을 온 몸으로 받으며 갈 길을 잡지 못하고 안절부절 입술을 깨물었다. 맙소사..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제임스!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걸리다니.. 그가 뭐라고 생각하겠어. 남의 집이나 훔쳐보는 변태라고 생각하겠지. 아니 너무 멀어서 날 알아보지도 못할텐데. 혼란스러운 머리를 식히지도 못하면서 망원경에 가까이 댄 눈을 떼지 않고 나그네를 바라보고 있자 제임스의 가상한 용기를 칭찬하기라도 하듯이 그가 쵸코파이를 먹을 때 빼고는 잘 움직이지 않는 입을 빠끔거리는게 보였다.

'안 녕'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분명 그리 말했으리. 아니 분명 눈이 틀렸을거야. 그가 갑자기 인사할리가 없잖아. 제임스는 비난도 아닌 친한 사람한테 인사하는 마냥 말을 거는 나그네에 당황해 깨물고 있던 입술을 뱉었다. 잘못 본건가? 아니면 뭐라고 한거지. 붕어마냥 입을 벌리고 있자 제대로 본거 맞다고 확신시켜주는 마냥 나그네는 발코니 가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상태로 몸까지 제임스쪽으로 돌려놓고는 반대 손으로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줬다. 대체 무슨. 제임스는 절대 연예인이 제 집을 훔쳐보는 팬에게 대할 자세가 아닌 태연한 행동에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한참이나 어버버 말을 잇지 못했다.



5-1.
나그네는 개봉 예정인 영화촬영을 위해 메이크업 하기 전 앞머리를 고정시키고 앉았다. 그 왼쪽에서는 코디가 분을 잔뜩 묻힌 솜덩어리를 들고 오고 오른쪽에서는 비광이 일하라는 듯 감시하고 서있었지만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촬영장에서 나그네는 늘어지게 하품하고 싶은 걸 참으며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표정 밖으로는 이미지 관리라며 애써 내색 하나 하지 않은 딱딱하게 굳힌 표정으로 있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코디는 나그네의 매끈한 피부에 톡톡 분을 펴바르며 진짜 잘생겼다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코디가 그의 얼굴에 감탄하며 멍하니 분칠을 하는동안 알게 모르게 그녀의 손에 들린 분이 잔뜩 묻어있던 솜에서는 분가루가 떨어져 나왔고 그것은 공중에서 흩어지면서 나그네의 코끝을 간질였다. 나그네는 손가락으로 코밑을 대충 훑으면서 참았지만 분가루는 쌓이다 쌓이다 결국에는 재채기하게 만들었다.

"고뿔이라도 온거여?"

크게 재채기 소리를 내자 코디는 놀라 물을 떠오겠다며 나가버렸고 둘만 남은 상황에서 비광은 팔짱을 끼고 훌쩍 코를 마시는 나그네를 내려다 보며 물었다. 그 걱정 섞인 말에 왠지 촬영을 펑크낼 수 있을거 같은 감이 온 나그네는 그녀를 향해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고 비광은 그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쳤다. 동시에 그니깐 평소에 발코니 문 닫고 자라했지 않았냐. 보일러 틀어주면 뭐하냐 하는 타박이 우르르 쏟아지자 나그네는 입을 비죽 내밀었다.

"누가 보고 있는데 문 닫으면 안되지."

누가가 아니고 그건 파파라치고. 다시 한번 비광이 답답해 복장 터질 거 같은 원인의 뒤통수를 후려치고는 물잔을 든 코디가 나타나자 아닌 척 팔짱을 꼈다. 그리고는 다시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나그네를 보며 곰곰히 생각에 빠졌다. 누가 보고있다고? 이놈의 새끼는 그걸 왜 이제 말해. 애초에 그 곳은 파파라치가 꼬일 일이 없는 곳인데 어째서? 그가 아무 곳에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그네의 숙소는 프리랜서 소속사에서도 특별히 선별해서 뽑아놓은 장소였고 원래 누군가 살던 집에서 그대로 몸만 들어가 이사왔다는 흔적도 없었다. 파파라치나 사생팬이 온거라면 일찍 경호원들이 쳐냈을텐데. 비광은 다시 백치 아닌척 얼굴 근육을 긴장시키고 있는 나그네를 보며 숙소를 옮겨야하나 고민했다. 일단 커튼 먼저 쳐놓고 밖으로 못나가게 해야겠다.



6.
제임스는 지하철에서도 학교에서도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멍한 상태였다. 나그네가 손을 흔들어줬다. 몰래 훔쳐보고 있던 저에게. 그 두 마디가 머리 속을 빙빙 돌고 있는 상태였다. 대체 무슨 의미지. 계속 봐도 된다는걸까? 나를 계속 알아차리고 있었어? 수업시간마저도 고민하고 그에 대해 생각하다 필기할 것을 엄청나게 놓쳐버렸다. 집에 가는 길에도 앞만 보고 멍하니 걷다 가게 간판에 머리를 박아버렸고. 거기다 엉망진창인 상태로 지하철을 타러 가다 어느 유명한 쉐프의 빵집의 투명유리 한쪽에서 그가 광고하는 초콜릿 화보까지 봐버려 머리속은 더 나그네로 가득 찼다. 처음 봤던 은하수에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거 같은 눈동자, 두번째로 봤던 바람보다 더 가벼운 손짓으로 인사하던 모습. 그리고 초콜릿색 거대 리본을 검은 정장을 빼입은 몸에 둘둘 감고 요사스럽게 웃고 있는 화보의 모습까지. 제임스는 어떻게 지하철을 타고 집까지 걸어왔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집 문을 열고 들어와 현관에 신발을 벗어놓고 여느 때와 같이 바로 망원경을 챙겼다.

"..아직 안 들어왔나?"

웬일인지 망원경 렌즈 너머로 보이는 그의 발코니 창문은 닫혀있고 심지어 분홍색 커튼까지 쳐져 있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지만 하도 바쁜 몸이다 보니 커튼을 쳐놓고 촬영을 하러갔나보다 제임스는 생각하고 그가 언제 돌아올지 몰라 발코니에 엉덩이를 붙이고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나 떠있던 해가 지고도 달이 하늘 정가운데에서 밝게 빛날 때가 되도 커튼은 걷힐 생각이 없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 건 아니였다. 커튼 너머로 분주한 그림자가 왔다갔다 하는게 보였다. 처음 그림자가 왔다갔다 하는게 보였는데도 커튼이 걷히지 않았을 때는 어째서? 하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 평소 아르바이트가 끝났을 시간이 되니 하루동안 고민했던 답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 때 나그네가 손을 흔들어줬던 것은 작별의 인사였나보다. 아니 일방적인 관계를 정리 당한거다. 제임스는 원망도 슬픔도 말도 없이 들고 있던 망원경에서 손을 뗐다. 이게 당연한 일인데도 배신당한 기분이 조금 들었다.




6-1.
더 이상 밤하늘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계속 시선이 그의 집으로 향한다. 그래도 커튼이 걷히지 않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커튼이 닫히고 열리지 않은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6-2.
다시 피시방에 들렸다. 아무래도 금단현상이 일어나는 마냥 그를 안보니 잠이 오지 않았다. 맨날 보고 자는게 일상이었는데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먼저 인터넷 창을 열고 그가 출현했다는 영화를 봤다. 처음으로 노래할 때 외의 목소리를 들었다. 깨끗한 화질로 선명한 그의 얼굴을 봤다. 매우 아름다웠지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제임스가 듣고 싶은 목소리는 이런 대본이나 읽는 내숭 가득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제임스가 보고 싶은 얼굴은 이런 화장품 따위를 바르고 예뻐보일려고 노력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커튼이 닫히고 열리지 않은지 일주일째 되던 날이었다.



6-3.
팬카페에 가입했다. 그가 하는 일을 가장 정확하고 빠르게 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중 공식 팬카페는 가입절차가 까다롭고 요구하는 조건이 많았는데 그렇게 따져 모아놓으니 생각보다 사람이 적어서 놀랍기도 했다. 대신 고급정보만을 모을 수 있었다. 별로 한 일은 없는데 그 팬카페에서 스텝이 되어있었다. 그래도 이 카페 사람들과 사생활에서의 그를 공유할 생각은 없었다. 커튼이 닫히고 열리지 않은지 이주일하고도 오일째 되던 날이었다.



6-4.
드디어 그가 출현하는 드라마 프로그램 영화를 다 봤다. 더 이상 볼게 없었다. 사실 이중에서도 특별한 감정이 드는 건 찾을 수 없었다. 뭐든 발코니에서 봤던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아 키스씬이 있던 영화에서의 상대 여배우에게는 조금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버렸을지도. 이러면 안되는거 아닌가? 싶었지만 진짜로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뭐. 커튼이 닫히고 열리지 않은지 두 달하고도 하루 되던 날이었다.



6-5.
아무래도 하교 후 피시방에 들려 몇 시간동안 그를 봤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이런 생활은 힘들었다. 피시방비도 이쯤되니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이 써버렸고 남는 건 없었다. 제가 스마트폰이 있는 것도 아니였으니 평소에는 느끼지 못한 부족함이 이제야 답답하기 그지 없다. 제임스는 피시방을 가야할지 말아야할지 망설이는 발걸음을 힘겹고 느릿하게 옮기다 언젠가 본 적 있는 익숙한 가게와 마주치고는 멈췄다. 그 때 초콜릿 화보가 있었던.. 순간 제임스의 머리속에 섬광이 훑고 지나갔다. 이 생각을 못했네!

"죄송한데.. 혹시 그 때."

제임스는 실례를 무릅쓰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벌써부터 달달한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나그네도 이런 달달한 것을 엄청 좋아했지. 그는 점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사정해 겨우 처분하지 않고 남아있던 화보를 받아왔다. 사진 속에 그도 마음에 들었지만 커튼이 열려 있던 그 때 사진이라도 찍어놓을걸 후회가 된다. 원룸 한 구석에 걸어놓으면서 제임스는 만족해 입가에 미세한 미소를 달았다. 다음엔 그가 찍은 화보 중 제일 마음에 들었던 청바지 화보를 프린팅 해볼까. 커튼이 닫히고 열리지 않은지 세달하고도 이주 하고도 다섯째 되던 날이었다.



7.
나그네의 생일은 그가 처음 무대에 오른 날짜로 팬들이 정해줬다. 그 날짜가 되면 잠잠하던 팬클럽 외에도 많은 팬들이 프리랜서 소속사로 많은 선물을 보냈고 양이 하도 많은지라 얼마 전 소속사는 다가오는 날짜에 공식 입장으로 선물을 보내지 말라는 공식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올해도 별로 다를 게 없을거라 너도 나도 모두 예상하고 있다. 그런 공식 발표가 나온지 이제는 시간이 좀 지났고 달력을 차근차근 짚으며 날짜를 세는 손가락이 점점 빨간 동그라미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제임스는 초조해져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제 원룸 벽벽마다 붙어있는 나그네의 사진을 보며 울 거 같은 표정을 지었다.

"형 어쩌죠.. 저 돈이 없어서 선물을 못 살거 같아요."

저번에 열심히 피시방을 다녔더니 후폭풍이 이제야 찾아왔다. 요즘에 점심마저도 대부분 굶고 다니는 제임스는 정말 아무리 털어도 천원 하나 안 나올 상황이 되버려 대답없는 화보에게 하소연했다. 아무리 미운 나그네라지만 앨범 하나 안 산 대신 생일선물 하나 정도는 챙겨주고 싶었다. 그는 축 쳐진 어깨를 피지 못하고 습관 마냥 발코니로 나갔다. 제일 먼저 아직도 닫혀있는 커튼과 해가 지기 전인 노을빛으로 물든 하늘이 눈에 띈다. 쌀쌀해진 공기를 들이마쉬며 제임스는 발코니 난간에 턱을 괴면서 땅을 바라봤다. 원룸이 3층인터라 땅에서 한참 떨어져있다. 그 밑으로는 검은 도둑 고양이가 살금살금 지나간다. 제임스는 멍하니 그에게 줄 생각치도 못하고 누구에게도 받아보지 못 했을, 그러나 돈을 들지 않는 선물을 고민하다 제 눈에 띈 고양이를 빤히 쳐다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노란 눈동자를 가진 녀석도 귀를 쫑긋이며 위를 올려다본다. 예뻐라. 그는 눈꼬리를 접고 샐쭉 웃었다.



7-1.
나그네는 답답해 창문을 열려할 때마다 비광에게 잔뜩 혼이나 처음에는 토라져 말도 안 할려했지만 시간이 많이 지난 터라 현재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며 반대쪽 방에 들어가 창문을 열었다. 아예 안된다는 것도 아니고 아쉬울 건 없으니깐. 햇빛도 환기도 안되는 제 방에서 나와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는 주방으로 나가 구석에 붙어있는 서랍에서 쵸코파이 상자를 열었다.

"아 하나도 없잖아."

나그네는 입에서 살살 녹을 것을 생각하며 풀어져있던 표정을 텅텅 빈 종이상자를 보며 확 굳히면서 고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간식시간인 지금 먹지 않으면 비광이 살찐다고 못 먹게 할 것은 안봐도 비디오니 나그네는 지금 당장 먹고 싶어 대충 손에 잡히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집을 나서려했다. 쵸코파이 사와야지. 비광은 숙소에 조용히 박혀있으라고 당부했지만 그는 그걸 그 사이에 까먹어 버리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여는 순간 문끄트머리에 낯선 택배상자가 걷어차인다.

"이게 뭐지?"

길을 막는 것에 나그네는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상자 위에 겹쳐진 또다른 쵸코파이 상자를 보고 화색했다. 쵸코파이! 쵸코파이 상자만은 냉큼 주워들고 주변을 두리번 살핀 나그네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싱글벙글 웃으며 다시 집에 들어서려했지만 문을 닫으려다 한번 더 걸리는 수상한 택배상자를 보고 잠시 고민했다. 비광이 아무거나 주워오지 말랬는데. 잠시 고민하던 나그네는 'B' 라는 메모지가 붙어있는 저 상자 속에 혹시 쵸코파이가 들어있지 않을까 싶어 갈등하던 끝에 택배상자 마저도 주섬주섬 챙겨왔다. 내일 비광 회사에 가면 또 잔뜩있겠지만 필요할 때 손에 잡히니 더 기분 좋지 않은가. 그는 택배 상자를 거실 식탁에 올려놓고 바로 쵸코파이 상자를 까 하나를 입에 물었다. 씹을 때마다 입에서 살살 녹는게 역시 쵸코파이다. 헤실헤실 풀어지는 얼굴로 자리에서 쵸코파이를 두 세개 더 먹고는 그는 뒤늦게 택배상자에 관심을 붙였다. 쵸코파이가 들어있어도 좋지만 초코바도 괜찮은데. 쩝 입맛을 다시며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며 나그네는 택배입구를 막은 테이프를 뗐다.

"욱.."

순간 상자가 열리자마자 역한 냄새가 훅 올라와 나그네는 기껏 먹은 쵸코파이를 게워낼 뻔 했다. 보고싶지는 않지만 보게 된 상자 안에는 검은 고양이가 들어있었다. 두 호박 같은 눈은 탁하게 풀려 원망하듯 나그네는 째려보고 있었다. 마주한 나그네의 눈동자에 혼란스러움과 두려움 공포가 감돌았다. 나그네는 자리에 단말마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비광..비광... 힘이 풀렸는지 움직이지 않은 다리를 질질 끌며 그는 거의 기어가듯이 손으로는 전화를 찾았다.




8.
제임스는 이어폰을 꼈다. 귓가에서는 어제 밤에 진행한 라디오 시작음이 들려온다. 간단한 인사와 노래, 프로그램 홍보가 있었지만 그는 다 뛰어넘고 게시트 인터뷰 부분을 틀었다. 나그네가 라디오에 출현한 건 처음 있는 일기도 하고 어제 진행한 라디오라면 제가 직접 집 앞에까지 가져다 놓은 선물을 받은 후였을테니 언급 한마디라도 있지 않을까하는 설렘이 가득했다. 아 역시 있네.

-최근에 충격적이던 일이 있다고 하던데? 

진행자가 사전에 얘기가 되어있는 질문인지 넌지시 그에게 묻자 나그네는 대본 읽듯이 술술 대답해내던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없었다. 마음에 들었을까? 그렇다고 말해.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이 머리속에 그려져 히죽히죽 웃으면서 듣고 있자 옆자리에 앉은 게임 중이던 중학생이 이상하게 바라봤다. 대답이 한참 없자 진행자는 화제를 돌리려고 노력했다. 선물에 대해 좀더 듣고 싶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일주일 정도는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거 같다고 생각하며 만족했다. 그러나 나그네는 제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를 억지로 짜낸 듯이 말을 이었다.

-.. 무슨 감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몰래 가져다 놓는건 비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악 문 듯한 발음이었다. 예상 외의 대답에 진행자는 네? 하며 되물었고 제임스는 실실 웃던 입꼬리를 박제하듯 일자로 고정시켰다. 역시 마음에 안들었나. 좀 더 돈을 많이 들이고 리본이라도 붙여서 정성스럽게 할 걸. 나름 열심히 준비했던건데 서운해 눈물이 살짝 눈가에 고인다. 조금만 돈이 많았더라면. 그러면서 그 부분만을 반복해서 스무번 정도 되감아 듣고서자 제임스는 그가 마음에 안 든 포인트가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아 몰래 집 앞에 두고 온건 내가 생각해도 별로였어. 고개를 연신 끄덕이던 그는 뭘 깨달은건지 피시방을 박차고 나왔다.



9.
나그네는 택배사건 이후로는 떨어져있지 않은 비광이 정 안되겠는지 5분만 다녀오겠다며 집을 비우는 그녀를 반강제적으로 보내줬다. 비광이 나간 후로부터는 방안에 짜게 식은 공기가 흐르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쇼파에 몸을 파묻고 느릿하게 숨만 쉬고 있는데 5분이 지났을까나 갑자기 현관문에서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비광? 나그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누군지도 묻지않고 잠금도어를 해제하고 벌컥 열어버렸다.

"...누구야?"

문너머에는 비광이 아닌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있었다. 피곤해보이는 듯 눈가는 거뭇거뭇했고 어쨌든 처음보는 사람이었다. 나그네가 표정을 굳히고 묻자 제임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을 망설이다 축 쳐진 눈꼬리를 살짝 접으며 말했다.

"B라고 해요."

그걸 물어본 게 아닌데. 자신을 B라고 밝힌 제임스는 나그네가 혹시 알아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빛으로 올려다봤고 나그네는 간지럽게 바라보기만 하는 그가 왠지 꺼림칙해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눈빛이 더러웠어. 끈적한 그림자 같은 것이 물고 늘어지는 거 같아 도어락마저도 잠가버렸다. 오래 있고 싶지 않아. 그렇게 정의내린 나그네는 현관문에서 멀리 떨어지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 때였다. 쾅쾅 현관문 전체를 떼어낼 듯이 울려대는 진동에 그는 온 몸을 움찔이며 자리에 굳은 듯이 서있었다.

-형. 문 좀 열어봐요. 이제야 보는데 너무해요. 저 형 엄청 보고싶었는데 나 기억 안나요? 아 기억할리가 없지. 형이 커튼까지 쳐버려서 시발 내가 얼마나 슬펐는데.. 형한테 욕한거 아니니까 놀라지마요. 제가 형한테 욕할리가 없잖아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다 잘못했으니깐 커튼도 걷어주고 이 문도 열어줘요.

현관문 너머로 아파트 복도를 울리는 목소리가 괴이하게 울렸다. 미친 사람인지 목소리가 울으면서 웃는 거 같기도 하고 바르르 떨려왔다. 나그네는 쉬지않고 문을 쳐대며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다시금 몰려오는 공포를 상기시켜 천천히 뒷걸음질해 거리를 벌렸다. 비광. 비광 어딨어. 급하게 비광을 찾아보지만 손에 잡히는건 휴대폰 밖에 없었다. 단축키 1번에 저장되어 있어 한번만 꾹 누르면 연결되겠지만 어째서인지 딱딱하게 굳은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집 전체가 제임스가 문을 내려치는 진동에 울려대 점점 공포심에 묻혀 정신을 놓을 거 같던 나그네는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휘적휘적 저어버리고는 휴대폰 1번을 꾹 눌렀다. 신호음이 이어지고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와 동시에 무섭게 몰아치던 소리가 멈췄다.

-지금 신고하려는 건 아니죠?

나그네는 침을 꿀꺽 삼켰다. 휴대폰 너머에서 비광이 부엉아? 하고 불러댔지만 답을 할 수 없었다.








앞쨘님 커미션 신청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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